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60
하옥 하루 만에 시작된 국문
순신 보기 위해 몰린 백성들
국문 멈추라는 상소 있었지만
목소리 못 낸 고위 공직자들
국문에 당당하게 맞선 이순신

조선 조정은 끝내 이순신을 ‘심판대’에 세웠다. 형조좌랑 강항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는데도, 조정 대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한 공정하지 않은 심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권력자들은 공정한 심판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만드는 건 정치 권력자들의 책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만드는 건 정치 권력자들의 책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이 하옥된 지 하루 만인 1597년 3월 5일부터 국문이 시작됐다.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뒤집어쓴 채 금부 나졸들에게 이끌려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에 도착했다. 길가에는 식전 아침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충용장군 김덕령에 이어 이번에는 더 공이 많은 이순신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다고 하니, 조선은 큰 인물을 용납하지 못하는가 보다”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간신의 무함이다’ ‘적국의 반간계다’란 말도 퍼져 나갔다. 

국문이 시작되기에 앞서 몇몇 정의롭고 심지가 굳은 중견 공직자들이 ‘이순신의 국문을 멈춰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반면 대부분의 조정 고위 공직자들은 선조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류성룡조차 이순신의 구명을 포기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형조좌랑 강항姜沆이 상소를 올렸다. “죄상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했거늘 갑자기 관리들의 의견에 따라 잡아들이고 원균으로 대임시킴은 불가합니다.” 강항은 임진왜란 당시 적에게 포로가 돼 왜나라로 잡혀 들어간 적이 있다. 이때 풍신수길이 그의 학문적인 명성과 신망을 높이 사서 옆에 두려 했다. 하지만 강항은 이를 거부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순신과 한산도에서 함께 지낸 바 있는 호조정랑 정경달도 상소로 변호했다. “이순신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적을 막는 재주는 옛날에도 짝을 이룰 자가 없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진중에 머물러 있는 것도 또 하나의 병법입니다. 어찌 기회를 보고 형세를 살피면서 방황하면서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사람을 죽여 사직이 망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위유사로 한산도에서 이순신과 조우했던 바 있는 황신도 구명에 나섰다. “악의를 내보내고 기겁騎劫이 대신함과 같으니 삼도의 장졸들은 사이가 나빠질 것이요, 염파가 물러가고 조괄趙括이 오는 것과 같으니, 백성들은 이로부터 전쟁에 패배하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가 악의 대신 기겁을 장수로 삼았다가 제나라에 성을 70개나 빼앗겼던 사례와 조나라가 염파 대신 조괄을 기용했다가 장평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빗댄 상소문이다. 조정은 이처럼 상식적이고, 공정하고, 날카로운 상소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숱한 모함에 시달린 이순신은 끝내 투옥되고 말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숱한 모함에 시달린 이순신은 끝내 투옥되고 말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 무렵 이순신의 파직 소식은 이미 명나라는 물론 바다 건너의 풍신수길에게도 전해졌다. 반간계가 성공하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풍신수길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조선 원정군에게 전면적인 공세를 벌일 것을 하명했다. 이순신이 체포되기 3일 전인 1597년 2월 22일의 일이다. 조선에서 벌어질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출발점으로, 일본에서는 이를 경장역慶長役이라고 한다.

이순신을 국문하는 1차 심문에서 윤근수는 “네가 나라의 은혜가 지중하거늘, 어찌 해서 두 마음을 품고 적장의 뇌물을 받고 가등청정을 잡지 않고 놓쳤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문하는 윤근수의 키는 중간치 이하였지만, 심문하는 목소리만은 웅장했다. 그는 당시 회갑(정유년생)을 맞은 61세의 원로였다. 53세인 이순신보다 8살 위였다. 

이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의신(자신을 낮춰 이르는 말)의 책무는 국가의 간성이 되는 데 있었으며 전란 이래 6년 동안 대소 100여번을 싸웠으나 지금까지 재략이 모자라 적을 섬멸하지 못한 죄는 1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소. 하지만 적에게서 뇌물을 받고 적을 놓아 준 일은 없소!” 

윤근수가 다시 따졌다. “너는 금부관원이 왕명을 받들고 너를 잡으러 내려갔을 때에도 거만하게 관원을 욕하고 사졸과 백성을 선동해 왕명을 받든 금부관원에게 폭행을 가하도록 시켰다. 남삼도의 연로에서도 관원들에 대한 방해가 대단하였다 한즉,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순신은 아무 가치 없는 질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첫날 국문은 이 정도의 말만 주고 받았다. 윤근수가 이순신의 무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정에선 첫날 국문이 철저하지 못함을 공격하는 논쟁이 일어났다.

임금을 속이고 적장에게 매수가 돼 조국을 판 이순신의 죄를 엄히 물어 ‘장하杖下의 원혼이 되게 만들라(죽을 때까지 곤장을 치라는 뜻)’는 주장이 쏟아졌다. 윤근수는 추관으로 나선 일을 후회했다. 악비를 몰아 죽인 진회秦檜의 사례가 떠올랐고, 후세의 공론도 두려웠다. 

이튿날, 2차 국문이 개시됐다. 윤근수가 물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네게 청병할 때 너는 어찌해서 출병하지 아니해 원균이 대패를 당하게 했는가?” 이순신은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그때는 원균이 이미 패전한 뒤였소. 더구나 관할하는 영역을 넘어 다른 도道로 출전하기 위해선 왕명이 있어야 하오. 왕명을 받지 못하고 경상도로 경역을 넘어 출전하면 월경한 죄를 물어야 하오.”

그러자 윤근수는 잠시 앉아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옥포·당포 등지에서 원균의 공이 으뜸이거늘 어찌해 너의 공인 것처럼 성상께 아뢰어 군부를 속였는가?” 이순신은 “갑의 공이니 을의 공이니 할 것 있소? 사직의 신령이 도우심이요, 삼도수군 제장이 싸워 올린 공이며, 만인이 봤으니 세상에서 정평이 있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윤근수는 황당한 질문도 던졌다.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이니 운주각이니 하는 집을 짓고 밤낮 주색에 빠졌다는 죄에 관해서도….” 이순신은 그의 말이 너무 비루해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기록관은 ‘이순신이 제 죄를 자인해 대답이 없다’고 적었다. 

이순신의 유창한 웅변에 윤근수는 정신이 나간 듯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고문을 하는 절차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자백을 받아 내지 못한 윤근수는 3차 국문에선 이순신을 고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순신을 강하게 몰아세웠다. “적장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오는 날을 알고도 더군다나 그를 잡으라는 도원수의 장령을 받고도 왜 가만히 있었는가. 가등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놓아버린 것 아닌가?” 입을 꽉 다물고 있던 이순신이 드디어 입을 열어 그때의 사정을 설명했다.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두 놈이 반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신들 나라의 군사 기밀을 우리나라의 군인에게, 하물며 일도의 육군대장이 되는 병마절도사(김응서) 또는 도원수의 진중을 찾아와 누설할 리가 있소? 정녕코 간교한 말로 우리를 큰 바다로 유인해 격멸하자는 것이니, 그 이리떼 같은 놈들이 와서 고하는 감언이설을 믿고 함정 속으로 스스로 빠지는 게 마땅하오? 그놈들이 임진년 이래로 수전水戰에서 우리에게 백전백패해 배겨 낼 수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이런 반간계를 짜낸 것인데, 어찌 빤하게 알고 속겠소?”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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