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박용하 시인의 조동진
서른 셋 시인이 써내린
회한 젖은 노인의 내면

조동진

세상 사람들 지치고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나

이제
슬픔도 지치고
그래도 나는 혼자 이 해변에 남아야 했고
바람도 지치고

10년이 지치고
내가 불던 하모니카도 끝나고
누가 언제까지 이 지상에 있나

나만 홀로 바다에 가고
바람만 홀로 세계에 남고
그 언젠가 눈물도 메마른 안개 낀 대지

이제
아픔도 지치고
그래도 나는 혼자 이 저녁에 남아야 했다 

「21세기 전망 제5집-시의 몰락, 시정신의 부활(1996년)」

가수 조동진.[사진 |=더스쿠프 포토]
가수 조동진.[사진 |=더스쿠프 포토]

가수 조동진을 좋아해 카세트테이프가 있던 시절에는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었다. CD가 나오자 당연히 구입해 듣고 또 들었다. 행복한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나뭇잎 사이로,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다시 부르는 노래, 제비꽃, 겨울비….

박용하 시인도 가수 조동진을 나처럼 좋아했었나 보다. 그런데 묘하게도 ‘지치다’라는 동사를 5번이나 쓰고 있다. 시의 제목을 ‘조동진’이라 붙이고는 세상 사람들 지치고, 슬픔도 지치고, 바람도 지치고, 10년이 지치고, 아픔도 지치고….

병이나 괴로움에 시달려 기운이 다 빠진 것을 지쳤다고 하는데 왜 서른세 살 시인이 지쳤다는 말을 이렇게 계속해서 한 것일까. 이 시를 썼던 시점에 가수의 나이는 만 49세로 제5집 ‘새벽안개’를 막 출반했을 때였다.

조동진 노래의 색조가 좀 차분하고 느리고 조용해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시인은 지쳤다는 말을 연상했는지 모르겠다. 이 시는 지난 생을 관조하며 회한에 젖어 있는 노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인이 강릉 태생이니 “나만 홀로 바다에 가고”가 이해되는데 “내가 불던 하모니카도 끝나고”는 모호하다.

아무튼 너무 일찍 생의 비애를 느꼈나 보다. 조동진의 노래를 듣다 보니 나 이제 살 만큼 살았다, 생은 결국 지치는 것, 홀로 황천길로 가는 것, 뭐 이런 것들이 생각난 모양인가.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가요 당신은 외로운가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조동진 행복한 사람·1979년). 


이런 노래를 듣고선 ‘지치다’는 말의 뜻을 탐색한 박용하 시인을 오랜만에 만나고 싶다. 박남철 시인과 셋이서 밤 깊도록 술을 마신 적도 있었는데.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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