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2회

▲ ▲일러스트 이진호
부산서 서울로 오는 길에 세 갈래가 있으니 그것을 삼로라 한다. 일찍 대장 변협이 말하되 “번호와 일본이 모두 이 삼로의 형세를 숙지하니 타일의 근심이 말할 수 없다”고 하던 것이 이것이다. 과연 일본군은 이 삼로로 갈라서 제일군 소서행장은 중로로, 제이군 가등청정은 좌로로, 제삼군 흑전장정은 우로로 향하여 올라온다.

순변사 이일이 300명에 불과한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에 와서, 조령을 지키는 조방장 변기의 군사와 합하여 1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문경聞慶을 지나 4월 22일에 상주尙州에 내도하였다.

부산서 서울로 오는 길에 세 갈래가 있으니 그것을 삼로라 한다. 일찍 대장 변협이 말하되 “번호와 일본이 모두 이 삼로의 형세를 숙지하니 타일의 근심이 말할 수 없다”고 하던 것이 이것이다.

과연 일본군은 이 삼로로 갈라서 제일군 소서행장은 중로로, 제이군 가등청정은 좌로로, 제삼군 흑전장정은 우로로 향하여 올라온다. 단, 수로는 여기에는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이순신만이 홀로 아는 일조노선이었다.

중로로 나선 소서행장은 양산 밀양 청도淸道 대구 인동仁同 선산善山을 거쳐 상주로 왔다. 강풍에 낙엽 쓸 듯 흡사 무인지경을 지나는 것과 같아서 수령 진수1) 방백2)할 것 없이 다투어 도망하고 군사도 백성도 다 달아나고 빈 성이던 것이었다.

▲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忠州 달천강을 등지고 탐금대彈琴臺 밑에 배수진을 치고 삼군에게 죽기로 싸워서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자는 말로 격려하고 엄명하였다. 사진은 신립장군의 영정.
이때에 이일은 이 세 길 중에 가운데 길로 적군이 올 것을 예상하고 상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일이 상주에 들어올 때에 10리 밖에 나와 영접하는 관원은 오직 상주판관 권길權吉이 있을 뿐이었다.

이일은 노하여 “목사는 어디가고 아니 나와 맞이하느냐?”고 판관에게 질문하였다. 이일은 신장 7척에 기골이 웅장하고 눈초리가 째지고 목소리가 우렁차고 하여서 일견에 장수의 위풍이 당당하였다.

판관 권길은 고하되 “목사 김해金는 순변사 사또를 출영한다고 칭탁하고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나갔으나, 중로에서 김해는 단기로 도주하고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하였다. 이일은 “군사가 다 어찌 되었다고?” 하고 노발대발하여 판관을 내어 베라고 호령이 추상같았다.

이일의 망동적 위압에 권길은 기가 막혀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소인이 죽기는 아깝지 아니하오만 사또는 군사도 적은데 무엇으로 적군을 막으려 하오? 소인도 국은을 입은 몸이 되어 그 만일을 보답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 되오니 오늘밤만 살려두면 밤사이라도 사력을 다하여 천명 군사를 모집하여 보겠소!” 하였다.

이일은 군사를 모집하여 보겠다는 통에 분이 풀어져 다시 호령하여 “참형은 잠시 중지하는 것이니 각별 거행하라”고 하였다. 판관 권길은 육방 관속을 총출동시켜 상주 군내에서 밤새 900명의 장정을 모집하였다.

모집된 군사라야 모두 훈련도 없는 농민 노동자들이다. 그래도 서울에서 큰 장수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집에 응한 모양이었다. 이일은 상주 기생 셋을 수청으로 불러 밤이 새도록 희롱하고 아침 늦게야 일어나서 정오가 지난 뒤에야 갑주에 위의를 갖추고 연병장에 나왔다.

이일이 새로 모집한 군사를 검열하고 부하군관을 시켜 진퇴하는 법과 대강 쉬운 무예 몇 가지를 가르치고 판관 권길을 잡아내어 죄를 말하며 “너를 응당 처참할 것이로되 군사 모집한 공로를 참작하여 감형한다”고 엄포하고 곤장 80에 처하였다. 이것은 목사 김해가 성을 버리고 도주한 죄이지, 판관 권길이 당할 죄는 아니다. 이일의 이 사리에 밝지 못한 처분을 당한 권길 이하 상주 장졸들은 모두 그 난폭함을 원망하였다.

이일이 전년 함경북병사로 재직할 때에 녹둔도사건으로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타살하려 하다가 순신의 당당한 인격과 엄정한 언론에 기운이 빠지고 혼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일이 지금까지도 그때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고 권판관의 충의를 몰라보고 상벌을 거꾸로 시행하여 군심을 잃고 패망을 자초하니 어리석도다.

권길은 군사를 모집해주고도 도리어 억울한 죄를 받아 매를 얻어맞았다. 또 군사를 훈련할 때에도 이일은 군사를 아끼고 동정하는 정이 조금도 없고 마치 개돼지 대하듯 하여 하루 동안에 두 명이나 목을 베었다. 매를 맞은 군사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피난해온 개령開寧 사람이 달려와 일본군이 선산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말을 들은 이일은 그 개령 사람을 잡아들여 말하길 “이놈, 죽일 놈! 14일에 일본군이 동래에 왔다 하거든 아무리 빨리 오기로 벌써 선산에 왔단 말이냐? 이놈, 헛소문을 내어서 군심을 소동케 하는 놈이니 곧 목을 베어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그 개령 백성은 머리를 두드리며 “소인이 추호인들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루 동안만 살려 두시어 내일 안으로 일본군이 상주에 들어오지를 아니하거든 그때에 죽여주시오” 하였다. 이일은 웃고 그 백성을 매를 쳐서 하옥하였다.

25일에 이일은 기병과 보병 2000여 인을 거느리고 북문 밖 연무장에 나가 진법을 연습하였다. 이일은 척후 정찰을 쓰지 아니하므로 적이 가까이 와도 모른다.

▲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과 수많은 조선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팔천고혼 위령탑.
소서군은 벌써 성중에 들어왔다. 군사들은 개령 백성과 같은 벌을 당할까 하여 고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일은 성이 함락된 줄도 몰랐다. 군관을 보내어 보고 오라 하였더니 군관은 말을 타고 가다가 일본군사의 총알에 맞아 죽는다. 이것을 본 이일은 비로소 놀랐다. 수없는 일본군은 고함을 치며 조총을 놓고 엄습하여 온다. 일본군은 조총대 수십명을 선봉으로 하여 관군의 전열을 공격하게 하고 진세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할 형세를 보였다.

진법을 연습하던 이일의 군사는 이일의 난폭한 행동을 내심으로 원망하다가 얼싸 좋다고 춤추며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다. 이일은 준마를 채찍질하여 말머리를 뒤로 돌려 달아난다.

이일의 종사관인 윤섬尹暹 박호朴 등이 “사또 어디를 가오?” 하고 따라온다. 이일은 뒤도 돌아볼 사이 없이 그 좋은 호달마3)의 강철 같은 말굽으로 안개 같은 먼지를 일으키고 번개같이 달아난다. 종사관 윤섬은 크게 부르짖으며 “이놈, 이일아! 국은이 망극하거든 싸우지도 아니하고 달아난단 말이냐? 남아가 이때를 당하여 절개를 지키고 의를 위해 죽어야 할 터이지!” 하고 적군 가운데로 말을 몰아 들어가 싸워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박호도 같이 싸우다가 절사節死하였다.
크게 믿었던 대장군 이일과 조방장 변기는 다 도망하였다. 이것을 보고는 판관 권길과 조방장의 종사관 이경류李慶流는 분개하여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다. 이경류는 죽고 난 뒤에 그 영혼이 불멸하여 수십년간 그 가족의 눈에 보였다는 말이 있어서 후세에까지 전하였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대장인 이일을 사로잡아 상을 받으려고 이일의 뒤를 급히 추격하였다. 이일은 황겁하여 갑주를 벗어버리고 이일이 아닌 체하기 위하여 상투를 풀어 산발하고 말도 버리고 도보로 조령을 넘어 주야로 도망하여 그 이튿날 충주에 들어가 도순변사 신립의 진에 당도하여 신립에게 고하되 군사가 적어서 패하였다고 울면서 호소한다.

이때에 도순변사 신립은 각도의 병마를 불러 모아 합 8000기를 거느리고 의기당당하게 충주성 북쪽 단월역丹月驛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일과 변기의 호소를 들은 신립은 다시 군사를 주어 선봉과 부선봉을 삼고 “패군한 죄는 공을 세워 갚으라” 하고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 등과 더불어 같이 군무를 보살폈다. 김여물은 유성룡의 수행원이던 것을 신립이 유성룡에게 청하여 종사관을 삼았던 것이었다.

신립의 진중에는 군사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온다 하면 어떻게 막을까 하는 것인데, 두 가지로 의논이 갈리었다.

 
하나는 김여물 이종장의 주장이니, 관군은 적고 적군은 많은즉 마땅히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지켜 군사를 산곡에 숨기고 기치를 많이 꽂고 연기를 피워 적으로 하여금 의혹이 나서 감히 고개를 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립의 주장인데,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 충주평야를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준비하였다가 일거에 격파하자는 것이니, 우리는 기병이라 산곡에서 싸우기는 불편하고 평야가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여물 등이 제시하는 주장을 불청하였다.

금은보화가 있어도 활용치 못하면 수전노에 불과하고 양약이 있어도 환자가 복용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을 뿐이다. 오자서의 계책이 있으나 오나라가 망하고 범증의 지모가 있으나 초패왕이 자결함은, 사람을 쓰고 안 쓰고와 말을 듣고 안 듣고에 달렸다. 아깝다, 신공이여! 기병이 비록 산곡의 험한 비탈길에서 말달리고 활쏘기는 불편하다 할 것이나, 말에서 내리면 보병이요 말에 오르면 기병이니, 어찌 임기응변함이 없이 교주고슬4)로써 병법을 논의할쏘냐. 김여물의 계책을 따르기만 하였던들 어찌 한 번 싸움에 패망하고 말았으리요. 병법에 이르기를 ‘일부당관에 만부막개라’5) 하였거늘!

김여물은 다시 신립을 보고 “적은 수의 군사를 가지고 수많은 적군을 대항하는 비결은 험고한 지리에 웅거하는 것이 득책이니, 훈련이 부족하고 또한 전쟁의 경험도 없는 8천의 병마로써 평지에서 그 몇 배나 되는 승승장구하는 적군과 싸운다는 것은 과부적중이라 만에 하나도 이로울 리 없으니 만일에 조령의 험고함을 이용하지 아니할진대 차라리 한강을 의지하여 한성이나 지키는 것이 옳을까 하오” 하였다.

신립은 자부심이 강한 까닭에 고집이 많다. 그래서 김여물의 양책을 불청하였다. 원래에 신립과 이일은 척후병을 쓰지 아니하는 때문에 적이 어디 있는 줄을 모른다.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섰는지도 알 수 없다.

신립은 말문이 막혀서 다만 “영감은 염려 마오. 적군은 내가 감당할 것이니” 하고 무슨 뜻인지 호기를 피웠다. 김여물은 신립의 무모한 고집으로 하여서 패할 줄을 짐작하매 죽을 바를 자각하고 자기의 아들 류에게 이러한 서간을 써 보냈다.

“삼도에 징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으니 우리들은 다만 빈주먹만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다. 남아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만 국치를 씻지 못하고 장부의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선조는 전년에 김성일이 장담하기를 일본군이 아니 오리라고 한 까닭에 군비가 해체되었다하여 참형에 처하려 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이 해명하여 구원하되 “김성일이 경상도내에 사림士林의 명망이 있으니 청컨대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선조는 김성일의 죄를 사하여 경상좌우도 초유사6)를 삼아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함안咸安군수 유숭인柳崇仁으로 진주병사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일본군은 상주를 점령한 뒤에 함창咸昌을 거쳐서 문경에 들어와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을 생포하여 항복하라고 권하였으나 신길원은 굴치 아니하고 대의로써 꾸짖다가 적이 사지를 끊어 해를 당하였다.

이때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서울에 들어왔다. 선조는 좌불안석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좌의정 유성룡에게 손바닥에 쓴 글자를 내어 보였다. ‘입마영강문’7)이라고 다섯 자가 쓰여 있다. 선조를 모시고 달아나자는 뜻이었다. 유성룡도 할 수 없어 이항복의 뜻을 선조에게 비밀히 상주하였다. 선조도 할 수 없이 몽진蒙塵할 준비를 단속하라 하였다.

선조는 우의정 이양원으로 수성대장을, 이전李으로 좌위장을, 변언수邊彦琇로 우위장을, 박충간朴忠侃으로 순검사를 삼아 한성을 지키게 하고, 경림군慶林君 김명원으로 도원수를, 신각申恪으로 부원수를 삼아 한강을 지키게 하였다.

 
한성을 지킬 군사는 모두가 7000명밖에 못되고 그것도 오합지중이 되어서 틈만 있으면 달아난다. 삼사 육조의 관리들도 반 이상이나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 할 것 없이 피난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밤을 타서 다들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들을 손잡고 달아나기를 일삼는다. 소위 대관들의 가족들도 다 피난길로 달아나고 종친들까지라도 달아나는 이가 많았다. 참 한심한 일이었다.

영부사 김귀영이 선조를 향해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시다니요! 종사가 있으니 죽기로써 지킴이 옳습니다” 하고 분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선조도 감동하여 “종묘사직이 이곳에 있거늘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시고 떠나지 아니할 것을 단언하였다.

전임 이조판서 유홍兪泓은 상소하여 “마혜8)는 궁중의 소용이 아니옵고 금은보화는 적병을 막는 병기가 아니오니 이런 것을 매입하여 도망할 준비를 하는 것은 망국지본이오니 모름지기 굳게 도성을 지켜 군신이 사직과 함께 죽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하는 큰소리를 하면서도 유홍은 자기의 가솔은 남보다 먼저 북도로 피난시켜 보내고는 이따위 큰소리를 하였다. 제신들은 그 사특함을 미워하였다.

이때에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忠州 달천강9)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 밑에 배수진을 치고 삼군에게 죽기로 싸워서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자는 말로 격려하고 엄명하였다.

후면에 강을 등져서 있으니 달아날 수도 없어서 8000의 기병은 다 결사적 전투를 결심 이행하게 하였다. 참으로 신립은 과감한 용장이었다.

일본군은 상주 함창 문경을 차례로 함락하고 조령 밑에 이르러 적장 소서행장은 척후대를 먼저 보내어 조선군의 복병 유무를 또는 지형을 심사하였다. 험애한 산곡이 30리를 뻗쳐 나간 외길목에 많지 않은 군사가 지키고 있어도 도저히 넘어올 수가 없게 되었다. 소서행장, 종의지 등 일본 제장은 조선의 대장 신립이 그 지모 없음을 웃었다.

일본군은 무사히 아무 저항도 없이 그 천험인 조령을 넘어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좌우 두 길로 군사를 갈라 신립의 진을 쳐들어 가다가 신립의 진에서 내닫는 기병의 풍우 치듯 하는 말굽에 전군이 위태하게 되었더니 때맞춰 일본 제이군의 가등청정의 부대가 죽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러 신립의 진을 좌우로 쳐들어와 행장의 군사와 합세하여 격전이 일어났다.

온종일 싸워서 엎치락뒤치락 피차에 사상이 많았다. 신립의 기병이 일본군의 조총에 연달아 거꾸러지고, 피곤하고 목이 말라서 달천강으로 몰려 들어가고, 종사관 김여물까지도 싸우다가 기진하여 강물에 뛰어 들어가 순사하였다.

신립은 기를 휘둘러 삼군을 지휘하여 격전하면서 탄금대로 올라가서 활을 당겨 적군을 쏘아 죽이다가 깍짓손에 불이 나면 탄금대에서 뛰어내려 강물에 손을 적시고 하기를 아홉 번이나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구초대九超臺라고 이름을 지어 부른다. 신립은 화살이 다함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인 황오黃五가 시를 지어 조의를 나타냈다.


 
본 저술자도 일수 시를 지어 조의를 표한다.


일본군은 신립의 대군을 격파하고 충주성을 점령한 뒤에 소서행장은 여주驪州로, 가등청정은 죽산竹山으로 향하여 각각 한성으로 쳐 올라갔다.

충주에서 신립이 패망한 경보가 서울에 들어왔다. 선조는 통곡하였다. 곧 대신들을 불러들려 계책을 물었다. 영의정 이산해가 “사세가 이러하니 잠깐이라도 평양으로 행행10)하심이 옳을까 합니다” 하였다. 도승지 이항복이 “서관11)을 거쳐 명나라로 향하여 회복을 도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이 탑전12)에 나아가 큰 소리를 지르며 “상감, 못가십니다! 종묘사직이 있는 한양을 사수하여야 할 일입니다!” 하고 권협은 머리를 조아려 피가 흘러 계단을 적셨으나 선조는 불청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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