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사일런스 ❸

종교의 존재 의미에 천착했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사일런스’에서 ‘믿음’이라는 것의 본질과 그것을 지켜가는 방식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천주쟁이’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에 혼쭐이 난 도쿠가와 막부는 대대적인 크리스천(기리시탄ㆍキリシタン) 탄압에 나선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종교의 독단성과 난폭성을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탄압 과정에서 벌어졌던 ‘후미에踏み絵’ 라는 기묘한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문자 그대로 ‘그림 밟기’인데, 자신이 더 이상 예수를 섬기지 않는다는 ‘전향轉向’의 의식이다.

페레이라 신부의 믿기 어려운 배교背敎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로 떠난 로드리게스와 가루페 신부는 나가사키 전역에 몰아닥친 가혹한 기독교 탄압 현장을 목도하고 각각 가까운 외딴섬으로 몸을 숨긴다. 기독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종교다. 도쿠가와 막부의 기독교 탄압은 로마 네로 황제의 그것을 능가한다.

고향을 떠난 기독교의 고된 여정이 딱하다. 로드리게스와 가루페 신부는 그들이 나가사키에 머물면 일본인 기리시탄들에 더욱 큰 고난이 닥칠 것을 우려해 외딴 섬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명분은 그렇다 했지만 아마도 역사적으로도 악명 높았던 당시 나가사키의 집정관 이노우에 마사히게井上政重의 끔찍한 일본식 탄압에 식겁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로드리게스, 가루페 신부 모두 체포당해 나가사키로 압송된다.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통상관계를 고려해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 과정에서 이들 신부들을 탄압은 하되 처형은 삼간다. 다만 신부들의 배교를 통해 일본 내 기리시탄들에 대한 선전 효과를 노린다.

페레이라 신부는 도쿠가와 막부의 야만스러운 고문에 자신의 ‘믿음’을 버린다. 일본 이름으로 개명한 채 아예 일본 선禪불교 스님으로 여생을 살아간다. 자신의 배교를 확인하러 찾아온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페레이라 신부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배교의 이유로 제시한다. 넓게 보면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그 가르침의 본질이 그렇게 목숨을 걸 만큼 서로 다른 것일까.

▲ 로드리게스 신부는 배교했지만 마음속에 믿음을 간직한 채 여생을 살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가루페 신부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殉敎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가루페 신부와 기리시탄들을 한배에 태우고 가루페 신부가 배교를 하지 않으면 기리시탄들을 한명씩 바다에 빠트려 죽인다. 가루페 신부는 배교를 거부하고 물에 빠진 기리시탄을 구하려 뛰어들어 순교한다. 반면 로드리게스 신부의 행적은 갈릴레오를 닮았다.

고문과 사형의 협박 앞에서 70세의 노인 갈릴레오는 자신의 지동설이 오류임을 고백하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진리의 불변성을 역설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면 어찌 보면 권력 앞에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는 ‘소심한 반항’쯤으로 들리기도 한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믿음을 수호하려 하나 눈앞에서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려나가는 기리시탄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배교해 살아남는다. 갈릴레오가 교황청의 힘 앞에 굴복해 자신의 지동설을 철회했듯 로드리게스 신부도 도쿠가와 막부의 무지막지한 힘 앞에 예수상像을 밟는 ‘후미에’의 배교 의식을 한 것이다.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온 키치지로에게 자신은 이미 신부가 아니므로 고해성사를 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다.

▲ 세 신부 중 누가 ‘믿음’이라는 것의 본질에 충실했던 것일까.[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자신의 믿음을 표면적으로는 철회했지만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듯 로드리게스 신부도 ‘그래도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중얼거리며 나머지 생을 보낸 셈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로드리게스 신부는 세월이 흘러 일본에서 숨을 거둔다. 관 속에 안치된 로드리게스 신부가 마지막 가는 길에 손에 쥐고 있던 것은 나무 십자가 하나였다.

우리의 어지러운 민주화 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페레이라 신부처럼 탄압과 고문에 못 이겨 독재 세력에 투항하고 완벽하게 전향한 ‘민주투사’도 있고, 누군가는 가루페 신부처럼 끝까지 믿음과 뜻을 굽히지 않은 채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죽어가기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믿음은 속으로만 간직한 채 다시는 그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고 엄혹한 시절을 숨죽여 지내기도 했다. 페레이라, 가루페, 로드리게스 신부, 이들 중 누가 가장 그리고 진정으로 ‘믿음’이라는 것의 본질에 충실했던 것일까.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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