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바디 오브 라이즈(Body of Lies) ❺

영화 ‘바디 오브 라이즈’의 두 주인공은 CIA 중동지역 책임자 에드 호프만(러셀 크로우)과 호프만 직속의 현장 요원 로저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둘은 같은 기관 소속에 이슬람 테러 정보수집과 테러 방지라는 뚜렷한 목표를 공유했다. 일사불란해야 마땅한데 왠지 삐그덕거린다. 드러내놓고 의견이 충돌하고 언쟁 하고 책상을 뒤엎고 관계가 파탄나진 않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고 껄끄럽다. 
 
에드 호프만은 버지니아 주 랭글리 CIA 본부에 근무한다. 전세계에 걸쳐 펼쳐놓은 CIA의 최첨단 정보수집 장치들이 긁어모은 모든 정보가 그의 책상 모니터에 들어온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최강의 검투사 ‘막시무스’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게 남은 러셀 크로우가 검은 뿔테 안경 끼고 책상에서 모니터 보면서 잔머리 굴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못내 당혹스럽다. 영국에 또 폭탄테러가 발생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당장이라도 기관총 들고 이라크로 날아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다. 
 
반면에 페리스는 사막의 모래먼지 마셔가면서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현장요원이다. 신분을 감추고 아랍의 시장통을 누비며 몸으로 부대껴 정보를 수집한다. 때로는 현지 끄나풀들을 포섭해 은밀한 정보를 긁어 모은다. 호프만의 시야는 넓고 그가 파악하는 정보가 광범위하다면 페리스의 정보는 제한적이다. 호프만의 정보가 피상적이라면 페리스가 파악한 정보는 심층적이다. 
 
‘광범위하지만 얕은(Broad but Shallow)’ 호프만의 정보와 ‘좁지만 깊은(Narrow but Deep)’ 페리스의 정보에 기반을 둔 상황판단과 대책이 다를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발생한다. 호프만은 페리스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페리스는 호프만이 ‘숲만 보고 정작 숲 속의 나무는 모른다’고 답답해한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부부가 ‘딴 주머니’를 차듯, 서로의 패를 감춘 채 필요한 부분만 공개하고 공유하면서 동일한 목표를 향해 불안한 동거를 하면서 각개약진한다.
 
▲ 페리스와 호프만은 같은 목표를 공유했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인적 정보수집’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소위 ‘휴민트(HUMINTㆍHuman Intelligence)’에 의존하는 페리스에게는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하고 ‘사람’이 자산이다. 현지 언어를 구사하며 정보 수집을 위해 현지인들과 부대끼고 어울리면서 그들이 악령이나 열등한 인간, 혹은 비非인간이 아닌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친다. 
 
그러나 호프만의 모니터에 숫자로만 존재하고, 3만5000㎞ 상공에 띄운 위성에서 촬영한 위성사진 속에서 몇 개의 점으로만 존재하는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의 단순한 ‘타깃’에 불과하다. 그들을 희생시키거나 제거할 때 그들의 고통이나 그 가족들의 비탄은 호프만의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거물 테러리스트 알 살림(Al-Saleem) 체포를 위해 영문도 모른 채 미끼로 던져진 요르단의 건실한 사업가 사디키(Sadiki)에게 닥친 죽음도 그에게는 모니터에서 점 하나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페리스는 비록 자신이 작전을 위해 미끼로 사용했지만 사디키의 목숨만은 지켜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사디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빠이고, 형제이며 누군가의 남편이다. 그들에게 사디키는 ‘점 하나’가 아니라 온 우주와도 같은 존재다. 온 우주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호프만은 이슬람 테러방지라는 미국의 숭고한 대의를 위해 희생된 아랍의 하찮은 ‘비인간’ 하나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는 페리스를 이해하기 어렵다.
 
▲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싱글세를 고려한다는 소문이 일자 비난이 쏟아졌다.[사진=뉴시스]
사회와 국가가 비대해지면서 국가의 관리자들에게 개개인들은 점점 ‘사람’이 아니라 무의미한 ‘하나의 점’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호프만과 같은 관리자들에게 우리는 그들 컴퓨터 모니터에 흘러가는 숫자나 그래프로만 잡힌다. 물가, 취업, 결혼, 출산, 주택, 사망…. 모두 그러하다. 우리의 고통, 슬픔, 분노는 결코 그들의 모니터에 전달되지 않는다. 당연히 모든 대책과 처방은 겉돈다.
 
수학여행 가던 아이들 배가 어이없이 가라앉아 수백명이 죽었는데 인당 보상금부터 계산한다. 출산율이 떨어지면 아이 낳으면 30만원을 주겠다고 한다. 결혼 안 하면 ‘독신세’라는 것을 물려볼까 궁리도 한다. 취업이 안 되면 눈높이를 낮추라고 일갈하고 모두 중동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못마땅해 한다.
 
국가의 관리자는 당연히 호프만처럼 ‘숲’을 봐야 하겠지만 페리스처럼 숲 속의 ‘나무’ 한그루 한그루도 알고 또 살펴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숫자도 아니고 점도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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