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프로메테우스 ❹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 ‘나는 회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무언가를 쉽게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실존적 인간이라는 거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믿어 의심치’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과 인공지능(AI)과의 관계를 그린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인공지능 로봇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밴더)가 담당한다. 마이클 패스밴더는 사람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니고, 사람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사람같은 인공지능 로봇을 실감나게 연기해 관객들에게 ‘묘한 심리적 협곡현상(uncanny valley effect)’이라는 심리현상을 느끼게 해준다. 

1919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언캐니(Uncanny, Das Unheimliche)’라는 작은 논문에서 ‘언캐니(uncanny)’라는 복잡미묘한 심리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친숙한 무언가가 일상성을 탈피할 때 가장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것이 된다고 한다. 상냥하던 사람이 갑자기 욕설을 해도 공포스럽지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혐오와 호감의 감정은 그렇게 위태롭게 서로 맞물려 있다. 

일본의 로봇 연구자인 모리 마사히로(Mori Masahiro)는 프로이트의 연구를 이어받아 로봇의 움직임이나 생김새가 인간의 모습에 근접하면 근접할수록 더 호감을 갖지만 인간과 너무 비슷하면 오히려 혐오감을 일으킨다는 연구결과를 내놓는다. 호감도가 혐오감으로 바뀌는 급격한 곡선이 계곡을 닮았다해서 ‘언캐니 밸리 효과(uncanny valley effect)’로 부른다. 

▲ 데이비드는 검은 액체가 에일리언 배양액임을 알고도 몰래 탐사선에 반입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 ‘프로메테우스’호의 탐사대원들도 데이비드를 대하는 기분들이 못내 ‘언캐니’하다. 분명 로봇인데 로봇답지 못하고 인간같다. 그래서 어정쩡하고 불편하고 기분 나쁘다. 인간같은데 로봇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래서 괴이하다. 호감과 혐오 사이를 오간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다른 탐사대원들이 그를 찝찝하게 여기는 것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데이비드는 인간도 로봇도 아닌 언캐니한 존재다. 너무도 인간같은 데이비드가 너무도 인간같지 않은 짓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른다. 또한 분명 로봇인데 로봇답지 않은 짓을 저지른다.

데이비드는 다른 탐사대원들과 미지의 행성에 착륙해 수상쩍은 검은 액체가 담긴 용기를 발견한다.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인공지능의 정수精髓인 데이비드는 그것이 에일리언의 배양액임을 인지하지만 다른 대원들 몰래 탐사선에 반입한다. 프로메테우스호의 과학전문대원인 데이비드는 분명 탐사대장이나 적어도 자신의 ‘주인’인 웨인랜드 회장에게 ‘과학적 발견(에일리언 배양액)’을 보고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다.

그리고 인간이 지시하지 않은 독자적인 과학실험에 나선다. 술병을 들고 찰리 할러웨이 박사의 방에 찾아가 수상쩍은 배양액 한방울을 술에 떨궈 마시게 한다. 당장 할러웨이 박사의 몸속에 에일리언의 DNA가 이식된다. 하필 그날 밤 할러웨이 박사와 잠자리를 한 엘리자베스 쇼박사는 에일리언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끔찍한 재앙을 맞이한다. 프로메테우스호는 공황상태에 빠져든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주인인 인간을 파괴하는 이 일련의 행동을 한 치의 흔들림이나 망설임 없이 저지른다. 자신의 ‘주인’인 인간의 지시와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주체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 

▲ 자신의 판단과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는 '막말'과 '폭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인간 이성의 시대를 열었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이 명제의 원래 글은 ‘나는 회의懷疑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Dubito, ergo, cogito, ergo sum)’이다. ‘생각’이란 의심하고 망설이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무엇인가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실존적 인간이 아니다. 생각없는 기계에 불과하다.

흔히 우리 사회를 ‘불신사회’라고 개탄하지만, 반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믿어 의심치’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과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곧바로 말로 옮기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것이 소위 ‘막말’과 ‘폭력’의 근원이다. 막말과 폭언, 폭행을 밥 먹듯 하는 회장님들도 계시고,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동료들과 국민들을 향해 소신으로 포장한 욕설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막말을 해댄다.

위층이 시끄럽다고 흉기를 구입하고 계획적으로 죽인다. ‘살인’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회의懷疑’하지 않는다. 뚜벅뚜벅 흉기를 구입하고 뚜벅뚜벅 위층으로 올라간다. 모두 인공지능 데이비드처럼 도무지 인간다운 ‘망설임’이 없다. 인공지능 로봇이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스스로가 데이비드와 같이 목적만 있을뿐 ‘회의’나 ‘생각’은 없는 인공지능이 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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