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동 굴레방로 걸어보니…

서울 마포구 아현동. 몇 년 사이 그곳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46년 된 고가도로가 철거됐고, 3885세대의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고가가 철거된 아현역에서 전통시장인 아현시장을 지나 마포래미안푸르지오(마래푸)를 거쳐 아현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걷는 1㎞ 남짓한 ‘굴레방로’. 이 길을 걷다보면 세월은 물론 공간의 간극마저 느껴진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윗동네(마래푸)와 아랫동네는 공기마저 달랐다.

▲ 굴레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세월과 공간의 간극이 느껴진다.[사진=천막사진관]
무더위가 본격 시작된다는 ‘초복初伏’. 절기에 걸맞게 폭염주의보가 내린 12일 오후 4시. 아현동에서도 예외 없이 무더위가 심술을 부렸다. 2호선 아현역 4번 출구에 선 기자는 길게 뻗은 8차선 대로를 등지고 ‘굴레방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 길 위에서 몇몇 주민을 만났고, 그들과 아현동의 변화를 얘기했다.

짧은 여정의 시작은 아현역 4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생활용품숍 ‘다이소’였다. 어느 곳을 가든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이소’지만 아현동에서만은 의미가 남다르다. 호프집ㆍ식당ㆍ이발소가 마치 주인인양 둥지를 틀고 있었던 S빌딩의 음침한 지하 1층을 단번에 바꿔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다이소를 ‘아현동 천지개벽의 상징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가는 길에 잠시 쉬고 있다는 정순목(가명ㆍ64) 할머니를 그 앞에서 만났다. “이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았지. 예전엔 여기 술집도 많고, 노점도 많았어요. 그런데 마포래미안푸르지오(마래푸)가 들어서면서 새롭게 정착한 주민들이 반대하면서 많이 없어졌지. 마래푸 주민들이 집값 떨어질까 봐 걱정돼서 마포구청에 민원을 많이 넣었던 모양이야. 나야 뭐 오래전부터 봐왔으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 눈엔 거슬렸나봐.”

정순목 할머니는 아현동 재개발지구의 단독주택에 살다가 마래푸에 입주한 몇 안되는 원주민이다. “나가라는데 그냥 버티고 있었지. 살던 데가 편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용역들이 와서 대문을 부수더라고. 무서워서 아파트로 이사 갔어.”

건물 화단에 걸터앉아 있던 할머니는 “이제 병원에 가봐야겠다”면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굴레방로를 따라 몇걸음 옮기자 금은방이 나타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그곳에선 주인 노부부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영순(가명ㆍ68) 할머니는 30년째 한자리에서 금은방을 하고 있다. “아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마래푸가 들어서면서 주변이 많이 변했지만 피부로 와닿진 않아요. 크게 상관이 없으니까. 다만 경기가 나빠진 건 느껴지죠. 그렇다고 우리가 뭐 다른 걸 할 것도 아니고, 그냥 아침 9시 반에 나왔다가 때 되면 문 닫고 들어가는 게 다죠.”

금은방을 나와 이끌리듯 들어간 곳은 아현시장. 2014~2015년에 걸쳐 현대화 작업을 한 덕분에 바닥과 천장이 깔끔하게 정비된 시장 골목 복판엔 둥근 평상이 놓여 있다. 마침 그곳에서 세 할머니가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엉덩이를 슬쩍 들이밀며 할머니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평생을 아현동에서 살았다는 김을순(가명ㆍ92) 할머니는 “저 큰 아파트 들어오고 여기 살던 사람들이 다 떠났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나라에서 길 낸다고 저 아래 노점상들도 다 밀어버리더라고. 세상이 변하는 걸 어쩌겠어.”

그 말을 가만 듣고 있던 신순자(가명ㆍ73) 할머니. 아들과 함께 아현시장에서 정육점을 한다는 신순자 할머니도 아현동에서만 50년을 살았다. “나 아는 사람들은 마포구 염리동으로 많이 이사했어. 이 동네? 많이 변했지. 고가도 없어지고 동네도 깨끗해졌는데 시장 오는 사람은 더 줄었어. 근처에 커다란 마트가 여러개 생겼거든. 아파트 사는 사람들이 마트로 가지, 여기 오려고 하나….”

박정례(가명ㆍ67) 할머니는 마래푸에 산다. 결혼한 딸집에 함께 살며 손자들을 봐준 지 1년째다. “시장 옆에 있는 단독주택 골목도 곧 철거한다고 해서 집주인들은 대부분 떠나고 세입자들만 남았다고 하더라고”라며 전해들은 얘기를 들려줬다.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사이 손님들 발길을 잡아보려는 몇몇 상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야속한 발걸음은 그 소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시장은 한산했다.

시장 골목길을 따라 나오니 바로 아파트 정문이다. 그 맞은편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편의점과 친환경농산물 판매전문점, 프랜차이즈 치킨가게, 반찬가게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내친김에 마래푸 단지로 걸어 올라가봤다. 학원을 마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노란색 학원버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아파트 단지 안을 오갔고, 마중 나온 엄마와 할머니는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 아현시장은 현대화 작업으로 깔끔해졌지만, 손님 발길은 여전히 뜸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1단지와 2단지 사이를 걸어 올라가다 다시 아파트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대가 높은 아파트 단지에 서자 조금 전 지나온 시장과 굴레방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신호등이 설치된 드넓은 아파트 단지와 달리 맞은편 굴레방로는 마을버스가 좁은 길을 오가고 있었다. 마치 딴 세상처럼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지던 찰나, 유모차를 끌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이주희(가명ㆍ31)씨와 마주쳤다.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자마자 마래푸에 들어왔다는 이씨는 2년차 아현동 주민이다. 하지만 입주 초기 불거져 여전히 갈등의 불씨가 남아 있는 노점 철저 문제 등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거기까지 내려갈 일이 별로 없어요.” 이씨가 이날 유모차를 끌고 들어간 곳은 아파트 입구에 자리한 친환경농산물 판매전문점. 딱 거기까지가 이씨의 아현동 생활권이다. 아현동에 살고는 있지만 쇼핑을 하거나 약속이 있을 땐 다른 동네로 간다.

다른 공간, 다른 공기

마래푸 입구를 지나 걸어 내려오면 바로 아현초등학교다. 포장마차가 늘어섰던 길가엔 이젠 대형 화분들이 가득하다. 그 옆으로 초록색 마을버스 2대가 바쁘게 오갔고, 하교한 학생들이 삼삼오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현초 담장을 따라 걷다 학교 앞 나무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던 중년 남성을 만났다. 김성태(가명ㆍ54)씨는 아현시장 인근 연립주택에 살다 재개발이 되면서 길 건너 아파트로 둥지를 옮겼다. “여기서만 30년을 살았는데, 많이 변했어요. 변하면 좋은 점도 있긴 한데, 세상이 많이 박해졌어요.”

김씨는 “이 일대가 대부분 재개발ㆍ재건축 지역인데 돈도 제대로 못 받고 나간 사람도 많다”며 “결국엔 법도, 정책도 ‘있는 사람들’ 위주”라고 토로했다. 아현동의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이웃을. 주민들 간의 갈등을 생생하게 지켜봤을 그의 공허한 눈빛이 잊히지 않는, 무더운 초복이었다.
김미란ㆍ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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