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50주년 참석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베트남에서 지내고 있는 김우중(81) 전 대우그룹 회장이 최근 국내에 들어와 이런저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우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이 계기다. 한때 재계 2위까지 올랐던 대우그룹이 창립 32년 만에 대마불사大馬不死란 속설을 깨고 해체된 지도 어언 18년. 그동안 옥고까지 치른 그는 대우 해체를 승복하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이젠 목소리를 내도 될 때라고 본 것인가.

▲ 김우중 전 회장은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을 통해 사라져가는 도전의식을 일깨우겠다”고 말했다.[사진=뉴시스]
“우리가 품었던 꿈과 열정, 우리의 노력, 우리가 이룩한 성과들은 반드시 평가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하 김 회장)은 3월 22일 저녁 옛 대우맨 500여명 앞에서 다소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다. 그는 또 “갑작스러운 외환위기로 세계경영을 완성하지 못했던 게 안타깝다”며 “GYBM사업(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을 통해 대우의 명예를 지키고 사라져가는 도전의식, 해외 개척 의지를 다시 일깨우겠다”는 말도 했다. 대우그룹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안타까운 만큼 반드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 셈이다.

이날 부인 정희자씨(전 힐튼호텔 회장)와 함께 환한 얼굴로 기념식장에 나왔던 그의 감회가 무척 깊었을 것 같다. 32년(1967~1999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던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된 지도 18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이 못내 아쉽고 그리웠을 것이다. 기념식에서는 김 회장과 대우그룹이 남긴 족적을 살펴보는 기회가 마련됐다. 대우그룹을 소개하는 멀티슬라이드를 복원 상영했고, 8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내 아버지의 연대기’ 하이라이트도 상영했다. 이 영화에서는 대우 임직원 100여명의 생생한 증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날 김 회장이 2011년부터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펼쳐온 GYBM 사업 현황과 경과 보고도 있었다. 그의 말과 글을 한데 엮은 신간 「김우중 어록-나의 시대, 나의 삶, 나의 생각」 헌정식도 열렸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대우 활동기의 기록물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특별전시회(3월 21일~4월 16일)를 마련했다. 이번 행사는 2009년 발족된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회장 장병주 전 ㈜대우 사장)가 주도했다.

김 회장은 이번 5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국내의 몇몇 언론과 인터뷰를 갖는 등 자신과 대우그룹 이미지 개선에 나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2000년부터 17년 정도 목소리를 낮추고 지내왔던 모습과는 좀 다르다. 자신과 대우에 대한 여론과 상황이  호전됐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는 건강 회복을 이유로 베트남 하노이 외곽에 머물며 한두달에 한번쯤 한국을 찾는다.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베트남이 옥고 등을 치르느라 나빠진 건강 회복에 좋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국내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대우그룹이 해체의 길로 들어선 1999년 11월 회장직에서 물러나 해외 유랑 길에 올랐다. 그러다 2005년 7월 분식회계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돼 2006년 11월 항소심에서 징역 8년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았다. 형 확정 후 2007년 말 특별사면 때까지 2년 반 동안 교도소와 병원을 오가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대우 명예회복 ‘선언’

그룹 해체 전 그는 전경련 회장으로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IMF 위기 속에서도 보란 듯이 기업 확장 전략을 구사하다 단기 유동성 위기에 몰려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20세기 한국 스타기업인 김우중이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김 회장은 1900년대 후반부 한국 경제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다. 1967년 두 사람이 동업해서 단돈 500만원으로 출발한 대우실업을 30여년 만에 국내 2위,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대우가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당시는 삼성ㆍ현대ㆍLG 등 먼저 터를 잡은 기업들이 이미 국내시장을 꽉 잡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그는 ‘수출과 기업 인수’라는 두가지 차별화된 방법을 썼다. 기존의 한국 기업들이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1년에 평균 280일을 해외에서 뛰며 ‘대우신화’를 창조했고, 후반부인 1993년께부터는 ‘세계경영’의 간판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당시 세계경영의 완성을 확신했고, 대한민국 경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철저한 현지화와 지역본사제도를 구상했다. 하지만 외환 위기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김대중 정부에 밉보여 기획 해체됐다는 정치적 음모론, IMF체제를 등에 업은 국제금융투기자본의 음모론, 구조조정에 실패해 시장의 신뢰를 잃은 나머지 스스로 해체의 길을 걷게 됐다는 자멸론 등이 아직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김 회장은 “대우의 상황을 왜곡 보고한 경제 관료들의 오도, IMF의 대기업 구조조정 압력, 외교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며 대우 해체에 김대중 정부의 영향이 컸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정부와) 외환위기 극복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컸다”며 “당시 전경련 회장으로 재계를 대표해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해 불편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김 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국 경제가 기업가 정신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기업인이 존경은커녕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선 경제에 희망이 없다”며 “기업인의 기를 살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후배 기업인들에겐 “지갑 속 돈을 세는 것보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성취감에 몰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자기 자식이 삼성전자에 취직하길 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해야 속 시원하다고 여기는 이율배반적 시각부터 버려야 한다”는 지적도 했다.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에 대한 국가 정책이 뒷전으로 밀린 점이 아쉽다는 뜻도 피력했다. 그는 “과거 대우의 성공과 실패가 국가 자산이 되길 바란다”며 “‘창조ㆍ도전ㆍ희생’ 을 바탕으로 했던 대우의 세계경영 정신을 되새겨 보면 경제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미완의 세계경영에 ‘회한’

1992년 북한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일, 1998년 당시 부동산 사업가였던 도널드 트럼프(현재 미국 대통령)를 만나 사업을 같이 했던 일화 등도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청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려고 애썼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GYBM 사업이 자기 인생의 마지막 ‘흔적’이 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재계에서 창업 1세대로 드물게 남은 ‘기업인 김우중’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선은 아직도 좀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 공과功過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기업인 김우중’에 대한 평가는 후일 역사에 맡기고, 그의 간판 브랜드였던 ‘세계경영과 기업가 정신’은 따로 떼 내 지금 활용하면 될 일이다. 대우 해체 18년이 지났지만 대우증권, 대우조선, 대우건설, ㈜대우 등 주요 계열사들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대우의 DNA를 간직한 채 새 주인 밑에서 그런대로 제몫을 하고 있다. 창업자가 떠나도 실력 있는 회사 법인체는 이처럼 살아남는 법이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lexlov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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