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연임 허창수 전경련 회장

2월 24일 정기총회에서 허창수(69) 전경련 회장이 마지못해 회장직 4연임을 수락했다. 의외였다. 이미 6년간 3연임해 온 그가 이번엔 그만두겠다는 뜻을 확실히 해 왔기 때문. 거론된 후보들이 모두 고사한데다 선장이 난파선을 그냥 두고 내리는 건 무책임하다는 논리가 작용한 것 같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해체 위기를 맞은 전경련을 그가 과연 살려내고 혁신할 수 있을까.

▲ 허창수 회장은 난파선 전경련을 그냥 두고 내리지 않았다. 그는 “전경련의 환골탈태”를 공언했다.[사진=뉴시스]
“더 좋은 분한테 물려주기 위해 (4연임을) 결심했다.” 허창수 회장은 2월 24일 전경련 정기총회 직전에 기자들이 ‘연임 수락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더 좋은 인물을 찾아 전경련 후임 회장직을 물려주기 위해 4연임을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어차피 맡았으니 잘 해보겠다는 뉘앙스가 아니다. 오히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맡긴 맡았으나 적절한 후임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다는 뜻으로 비친다. 곡절은 있었지만 정식 선출을 앞둔 36대 전경련 회장이 마치 ‘임시 회장’ 같은 느낌의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에 전경련의 현재와 허 회장의 고민이 다 들어 있어 보인다. 

그는 지난 연말 이번 임기(올해 2월)를 끝으로 전경련 회장직을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 2011년 33대 회장에 올라 3연임을 했으니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게다가 2015년에도 임기(34대)가 끝나면 그만두겠다는 뜻을 강하게 비쳤었다. 그때도  재계가 마땅한 후임자를 내놓지 못한 가운데 떠밀린 듯 3연임(35대)을 수락했다. 그렇게 맡았던 임기 후반부인 2016년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만 것.

전경련은 미르ㆍK스포츠재단 출연금 문제로 정경유착의 진원지라며 세간의 지탄을 받았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들로부터 해체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국 재계의 맏형 전경련이 창립 56년 만에 강력한 ‘해체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허 회장은 뜻하지 않게 이런 사태의 중심부에 서게 됐다.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 머리를 숙였고, 어설픈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한국 재계에서 신사로 통하는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허 회장은 재계 순위 7위(공기업 제외) GS그룹의 오너 회장이 아닌가. 자기 사업 챙기기도 보통 일이 아닌 시기에 재계 봉사 차원에서 떠밀린 듯 맡았던 전경련 회장직 말년에 전대미문의 큰 풍파를 만난 셈이다. 그러니 이번 4연임 얘기에 손사래를 쳤을 것이란 짐작이 들고도 남는다.

하지만 예상은 깨졌다. 그는 2월 24일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36대 전경련 회장으로 재추대됐다. 유임 결정으로 4연임에 들어간 것이다. 총회 바로 전날까지도 차기 회장 후보가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던 만큼 무척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왜 수락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러 얘기가 나왔지만 대개 두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사론固辭論과 책임론責任論이 그것이다.

고사론은 열심히 차기 새 회장 후보를 찾았지만 재계나 관계 인물 모두가 사양해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다. 재계 10대 그룹에 속하는 오너 회장들은 물론 한덕수 전 국무총리,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등 관료 출신들도 고사해 애초부터 후보 찾기가 난관에 봉착했다.

이후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얘기가 흘러나왔다. 막판에 적임자란 얘길 많이 들었던 손 회장마저 끝내 고사하면서 새 회장 찾기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대안 부재 상황에서 허 회장이 그냥 물러나긴 힘들었을 거란 분석이다. 새 회장 옹립 뒤 쇄신안을 마련하고 조직 재정비에 나설 방침이었던 전경련의 해체 위기 대응 복안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4연임에 숨은 선장의 고민

책임론은 어쨌든 허 회장이 난파선인 전경련의 선장이었던 만큼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책임을 지고 해체 위기 수습과 전경련 리모델링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새 회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물러날 경우 회장 공석이나 임시회장 체제 가동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럴 경우 전경련 해체 주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실제로 해체에 직면할지 모르는 만큼 그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전경련 관계자가 “회장단이 차기 회장 추대를 위해 여러 차례 논의를 했지만 누구보다 전경련 상황을 잘 알고 사태를 가장 잘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 허 회장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밝힌 데서도 허 회장 책임론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허 회장 스스로도 취임사를 통해 “훌륭한 분이 새 회장으로 추대돼 전경련을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다소 여의치 못해 제가 이번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하루빨리 전경련을 안정시키고 새 모습을 갖추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밝혔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후임 없이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날 경우 GS그룹 오너인 자신과 그룹 이미지에 결코 득이 될 수 없다는 판단도 유임 결심에 일조했을 것 같다. 책임론의 또 다른 줄기인 셈이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전경련의 혁신과 환골탈태를 공언했다. ▲정경유착 근절 ▲투명성 강화 ▲싱크탱크 기능 강화 등 3대 혁신방향도 제시했다. 허 회장은 “앞으로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정경유착 재발방지를 위한 시스템을 마련할 것”이라면서 “투명성 강화를 위해 사업과 회계 등 전경련의 모든 활동을 보다 상세하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싱크탱크 기능을 강화해 우리 경제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는 혁신위원회를 가동하기로 했다.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등 전경련 내부 인사 3인과 명망 있는 외부인사 3인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혁신 작업에 속도를 내겠다는 얘기다.

문제는 급조된 듯한 허창수 전경련호號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무척 따갑다는 점이다. 그가 전경련 수장 공백 사태를 겨우 불식시키고 혁신의 기치를 내걸긴 했지만 해체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해결까지는 갈 길이 무척 멀다는 시각이다. 해체를 피하면서 정경유착의 산실이란 오명에서 벗어나야 하고, 4대그룹 등 탈퇴 도미노가 진행되는 가운데 사업 예산도 확보해야 하는 고민이 생겼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리모델링해 국민들과 재계로부터 인정받고 나아가 탈퇴한 회원들도 재가입시켜야 한다는 숙제도 떠안았다.

전경련 리모델링 가능할까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묵묵히 사업을 챙기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재벌 총수나 경영자들과 달리 특별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없다. 그룹 경영에서 변화와 혁신, 현장을 강조하면서도 비교적 합리적인 경영 스타일을 구사해 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재계에서는 그가 “손해를 봐도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전경련 수장으로서는 뚜렷한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듣는다. GS경영은 모르겠지만 전경련 회장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별로 후하지 않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혁신 대상자들에게 혁신의 칼자루를 쥐어 준 형국인데 전경련 쇄신이 어찌 잘 되겠느냐고 예단한다. 해체냐 혁신 후 생존이냐의 갈림길에 선 전경련의 과도기 선장을 맡은 그가 배를 잘 몰아 후임 선장에게 안전하게 인계할지 주목된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lexlov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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