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의 피해자 코스프레

지난 6일 열린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의 국정조사 현장. 이 자리에 참석한 재벌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입을 맞춘 듯 ‘권력이 요구하는 데 어쩌겠느냐’는 답변만 늘어놨다. 기만이다. 권력을 등에 업고 성장한 재벌은 권력의 입을 닦아주고 알찬 열매들을 얻어냈다. 누가 이를 부인하겠는가. 정경유착,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국민들은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으로 재벌 대기업을 지목하고 있다.[사진=뉴시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9명의 총수들이 나란히 서서 손을 들고 선서를 했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대기업 그룹을 이끄는 오너다. 9개 그룹의 자산총액을 더하면 1079조9170억원(2016년 하반기 공정위 대기업집단 규정 조건 기준). 이들의 자산총액을 쏟으면 우리나라 경제위기의 뇌관으로 꼽히는 가계부채(1257조원)를 85%가량 줄일 수 있는 수준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재계 수장들이 국회에 모인 것도 1988년 ‘5공 청문회’ 이후 처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벌’이라는 점 말고 또 있다. 최순실씨가 실소유주라는 미르ㆍK스포츠 재단에 억대의 자산을 출연했다는 것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를 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일부는 사업이 술술 풀렸다. 당연히 특혜 의혹이 새어나왔고, 이는 이들이 국회에 일렬로 앉게 된 빌미가 됐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성태(새누리당) 의원의 개회사를 들어보자.

“이번 게이트와 관련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국민 앞에 솔직히 사과함으로써 용서를 구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정경유착은 결코 없을 것이란 단호한 각오와 의지를 보여달라.”

청문회의 목적은 간단했다. 그간 제기됐던 의혹을 이 자리에서 낱낱이 밝혀 정경유착을 끊어내자는 거다. 정경유착의 근절은 200만명의 국민들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국민들의 바람이 통한 걸까. 의미있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총 58차례 질의 중 43번의 질의가 집중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그간 정부와 기업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온 전경련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세웠다. 엉뚱하게도 그의 손자 이재용 부회장이 해체의 칼을 든 셈이다.

이외에도 이 부회장은 “미래전략실(미전실)을 해체하겠다”고도 말했다. 미전실 폐지는 단순히 조직 하나를 없애는 게 아니다. 미전실은 수많은 계열사에 지시하고 최종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오너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에 변화를 주겠다는 의미다. 또한 이 부회장은 “광고로 언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였다. 우리나라 경제를 이끄는 재벌 총수들은 속 시원한 말 한마디를 내뱉지 않았다. 입이라도 맞춘 듯 “잘 모르겠다”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3시간 동안 이어진 질문 공세에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하태경(새누리당) 의원은 이런 한탄을 하기도 했다. “오늘 청문회에 일해재단에 기부금을 냈던 재벌 총수들의 자제분이 6명 나왔다. 이건 근 30년간 정경유착의 패단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나온 2세들도 답변이 엉망이다. 정경유착을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제발 보여달라.”

 

이들은 정경유착이란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안민석(더민주당) 의원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정경유착 고리 끊겠다고 약속할 수 있냐”고 묻자 이 부회장은 “이번 불미스러운 일로 저 자신을 비롯해… 경솔했던 일이 많았던 것 같다”고 동문서답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어떤 압력이든 강요든 제가 철저하게 좋은 회사의 모습을 만들도록 성심성의껏 노력하겠다”고만 말했다. 안 의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최 회장 역시 “할 수 있는 것 다 하도록 하겠다”고만 짧게 답했다.

오히려 재벌 총수가 정치권에 엉뚱한 요청을 하기도 했다. “청년 일자리를 늘려달라”는 이완영(새누리당) 의원의 질의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우리(롯데그룹)는 투자를 많이 하고 싶지만 슈퍼, 쇼핑센터 출점 규제로 투자를 못하는 부분이 있다”며 “규제를 완화해 준다면 더 좋은 일자리를 젊은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최씨의 요구에 70억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이유를 해명하지 않았다. 대신 기업의 민원만을 호소한 셈이다.

국회에 불려온 9인의 총수

이들은 되레 “권력이 돈을 내라면 어쩔 수 없이 돈을 내야 한다”며 피해자 행세를 했다. 청와대의 요청에 재단에 출연금을 낸 것에는 대가성도 없었다는 주장이다.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에도 재단 기금 출연 요청을 받거나 민원 요청을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저 “대통령이 국가경제와 일자리 창출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고 정리했다.

결국 청문회로 밝혀진 총수들의 정체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뜯긴 피해자’다. 얼핏 타당한 얘기 같다. 하지만 중요한 이유가 빠졌다. 도대체 왜 재벌들이 정부에 돈을 낼 수밖에 없었는가다. 당시 재계 상황을 살펴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를 보자. 당시 합병은 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의 반대와 외국계 주주들, 삼성물산 개인 투자자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백기사’로 나선 것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은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합병 결정으로 손해를 봐야 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제일모직(5.04%)보다 옛 삼성물산(11.61%) 보유 지분이 더 많았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이 1대 0.35으로 결정되면서 손해를 봤다. 유수의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국민연금에 합병안에 반대할 것을 권고한 이유다.

 

삼성 손 들어준 국민연금

반면 합병 당시 제일모직 지분만 23.24 %를 갖고 있던 이재용 부회장은 합병 법인이자 그룹의 모기업이 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가 됐다. 이후 삼성은 두 재단에 204억원의 돈을 내고 정유라씨에게도 35억원을 지원했다. 배임죄로 두번씩이나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최태원 SK 회장은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조세포탈 혐의로 재판을 받던 도중 구속 집행정지 상태였던 이재현 CJ 회장 역시 사면됐다. 형제의 난으로 검찰 수사를 받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롯데 역시 마찬가지다. 신동빈 회장이 출국금지까지 당하며 압박을 당했지만 유야무야 수사가 끝났다. 신 회장은 여전히 그룹을 장악하고 있다.

국민들이 “재벌은 피해자가 아닌 주범”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정치권력과 재벌권력의 결탁인 정경유착이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또다른 축이라는 거다. 이런 정경유착을 없애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정경유착은 공정한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고 피해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당연히 검은 거래에 끼어들지 못하는 자들이다. 가령 특혜를 받은 대기업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의 출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우리나라 시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용을 4% 담당하는 100대 기업이 매출액은 29%, 이익은 60%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 경제의 상황이다.

이번 정경유착 사태가 더 악독한 건 ‘팍팍한 서민의 삶’을 상대로도 거래를 했다는 점이다. 재단 모금의 창구역할을 한 전경련의 활동을 보자. 내년도 최저임금은 올해보다 440원 오른 시급 6470원으로 결정됐다. 노동계와 시민단체에서 요구한 두 자릿수 인상률은커녕 지난해(8.1%)보다 못한 7.3% 인상에 그쳤다. 영세ㆍ중소기업 사업주의 어려움을 앞세워 최저임금 동결 논리를 폈던 전경련의 역할이 컸다.

재벌은 피해자 아닌 공범

국가 재정에 구멍이 뚫렸으니 법인세부터 정상화하자는 말에도 전경련은 펄쩍 뛰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영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에 짐을 얹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주장이다. 국내 기업들이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이밖에도 전경련은 기업의 이익과 직결된 규제를 풀라고 정권에 줄기차게 요구했다. 발표하는 경제 연구 보고서도 대기업의 입장만 대변했다. 그사이 창조경제를 성장동력으로 삼고 경제민주화를 통한 상생을 표방하던 ‘박근혜노믹스’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창조경제는 또다른 정경유착의 놀이터가 됐고 경제민주화 공약 대부분은 폐기됐다.

국민들은 저임금 일자리와 늘어가는 가계부채에 짓눌려 힘든 삶을 이어가는 중인데도 말이다. 결국 지난 4년간 성장은 정체됐고 분배는 불공평해졌다. 김호균 명지대(경제정보학) 교수는 “대기업이 정말 피해자가 되려면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았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임금도 낮고 세금도 낮아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며 “피해 본 것도 없이 피해자인 척 굴어서 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진짜 피해자는 이들의 정경유착으로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잃은 우리 국민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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