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투자은행의 현주소

우리나라에 증권시장이 돛을 올린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사이 시가총액은 8만배가 넘게 늘었고 상장사는 160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자본시장을 이끌 투자은행(IB)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시장은 한발 늦은 정부 정책과 단기성과에 집중하는 증권사의 영업 구조를 요인으로 꼽고 있다.

▲ 국내 증권사의 대형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투자은행의 출현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사진=뉴시스]

자본시장의 ‘꽃’이라고 불리는 증권시장이 우리나라에서 출범한 지 60년이 지났다.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하면서 시작된 증권시장은 6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1956년 12개에 불과했던 상장사는 올 1월 기준 1927개(유가증권 770개ㆍ코스닥 1157개)로 160배 이상 증가했다. 일평균 거래대금은 4조7741억원으로 1965년의 3100만원에 비해 15만배 증가했다. 종합주가지수 산출 방식 변경 직후인 1983년 118.27포인트였던 코스피지수는 6년 뒤인 1989년 3월 1000포인트대로 상승했고 2007년 7월에는 2000포인트를 돌파했다.

1965년 150억원 수준이던 시가총액은 지난 1월 기준 1207조4580억원으로 증가했다. 이는 50년만에 8만2895배가 성장한 것으로 세계 13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수치다. 최근에는 한국거래소의 증권시장 시스템을 베트남에 수출하는 등 증권시장의 질적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증권시장의 성장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투자은행(IB)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고 있다. 최근 대형 증권사의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지면서 시장은 한국형 IB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M&A에 성공한 증권사도 IB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2014년 M&A에 성공한 NH투자증권은 메릴린치골드만삭스 등 선진 투자은행의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KDB대우증권 인수에 성공한 미래에셋증권도 일본의 노무라증권을 뛰어넘는 글로벌 IB로 성장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증권을 품은 KB금융지주도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를 지향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글로벌 IB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자본 규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IB은행의 맏형격인 골드만삭스의 자기자본은 91조원에 달한다. 가까운 일본 노무라증권의 자기자본도 28조원 수준으로 자기자본 3조원 이상의 국내증권사 6곳을 모두 합한 금액(22조3400억원)보다 많다.

여전히 높은 위탁매매비중

한국형 투자은행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금융당국은 2013년 10월 자기자본 3조원 이상인 삼성증권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KDB대우증권한국투자증권현대증권 등 5곳을 종합금융투자사업자로 선정했다. 금융당국은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선정을 통해 기업신용공여, 전담중개(프라임브로커리지) 업무를 통해 기업 투자와 융자, M&A 등 종합적인 기업금융 업무를 시작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종합금융투자사업자 선정 3년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장은 증권사 사업구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원인으로 꼽았다. 글로벌 투자은행을 육성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위탁판매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4년 말 기준 국내 증권사 수익 중 위탁매매 비중은 41.9%에 달했지만 IB부문은 9.6%에 불과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난해 상반기 일평균 거래금액이 크게 증가하면서 증권사의 수익성이 개선됐다”며 “하지만 이는 위탁매매수수료 수익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IB 관련 업무가 활발한 대형 증권사의 IB부분의 매출 비중은 여전히 10% 중반에 불과하다”며 “IB 부분 수익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위탁수수료 중심의 영업이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IB부분에서도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보다 신용공여(기업금융과 프로젝트금융 등) 업무 등 단기적으로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부문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증권업계는 한국형 IB가 활성화되지 못한 원인으로 정부의 규제와 시장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제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9년 시행된 자본시장통합법과 2013년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일례로 꼽았다. 자본시장통합법 이른바 자통법은 2009년 2월 시행됐다. 이 법안은 한국형 IB의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기존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증권업자산운용업선물업신탁업 등 자본시장과 관련된 법안을 통합한 것으로 모든 금융상품을 취급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2007년 7월 국회를 통과한 이 법이 시행되기까지는 1년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증권업계가 타격을 입었고 투자은행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증권회사의 단기성과 주의와 정부의 규제가 투자은행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사진=뉴시스]
자기자본 3조원 이상의 기업들이 기업신용공여와 연기금, 해외 헤지펀드 등을 대상으로 한 프라임브로커 등을 허용한 자본시장법도 비슷한 케이스다. 이미 대형 증권사가 지난 2011년 한국형 투자은행이 되기 위한 조건을 갖췄지만 법안이 통과되기까지는 3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업용순자본비율(NCR) 등의 규제 완화는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증권업계는 NCR 규정 등 투자은행의 성장을 막을 수 있는 규제가 완화되지 않으면 크게 바뀌는 것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금융당국도 투자위험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NCR 합리적인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규제는 완화되지 않았다.

뒤늦은 정책도 투자은행 출현 막아

다행히 올해 하반기부터 종합금융투자사업자의 NCR규제가 완화될 전망이다. 금융당국이 기업신용공여신용융자예탁증권담보대출 등과 합산해 자기자본의 100%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신용공여 한도를 기업신용공여만 따로 떼어내 자기자본의 100%까지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권사가 단기성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시장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지 못한 정부의 정책도 투자은행의 출현을 막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M&A로 대형증권사가 등장했고 정부의 규제도 완화되고 있다”며 “증권사의 전략도 다양화되고 있는 만큼 투자은행으로 성장하기 위한 증권사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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