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식품이 사라진다

▲ 농심 ‘짜왕’을 시작으로 형성된 프리미엄 라면 시장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프리미엄 라면은 일반라면에 비해 두배 이상 비싸다.[사진=뉴시스]
이쯤 되면 ‘배신’이다. 사이좋게 지내던 친구가 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동네를 떠났다. 다른 친구는 몸값을 올렸다. 서민의 친구나 다름없던 라면과 소주의 얘기다. 라면은 프리미엄 시장이 열렸고, 소주는 출고가가 인상돼 몇몇 음식점에서는 벌써 5000원에 팔리고 있다.

# 1996년. 강재민(41ㆍ가명)씨는 연초부터 금주ㆍ금연의 압박을 받았다. ‘이제 슬슬 건강을 챙길 나이’라는 걱정 섞인 잔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따로 풀 데가 없는 강씨는 술과 담배를 포기할 수 없다. 혼자 벌어서 네 식구가 먹고살아야 하는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그 정도는 자신을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다.

건설업체에 다니는 강씨는 한달에 약 167만원을 번다. 특별한 취미가 없는 그가 돈을 쓸 데라고는 하루 한 갑 피우는 담배(디스 1000원), 일주일에 두어번 집에서 반주로 마시는 소주(진로소주 600원)가 전부다. 기껏 욕심을 부려봤자 일주일에 한번 야식으로 끓여먹는 라면(신라면 300원) 정도다. 한달에 3만6000원, 월급의 약 2%를 차지하는 소박한 사치다.

# 2016년의 김석우(42ㆍ가명)씨도 건설업체에 다닌다. 직장생활 15년차인 그에게 술과 담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새해를 계기로 금연을 결심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지난해 담뱃값이 오른 후 부쩍 늘어난 아내의 잔소리도 금연을 결심하게 했다.

2016년의 김씨가 1996년의 강씨처럼 술과 담배, 라면을 먹는다고 가정해보자. 담배는 2015년 1월 1일 4000원(디스 기준)으로 올랐다. 지난해 말 출고가가 오른 소주의 소비자가격도 1070원에서 1130원으로 상승했다. 라면의 평균 소비자가격은 630원이다.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담배는 4배, 소주와 라면은 약 2배 올랐다. 그의 월급명세서에 적힌 2016년의 월급은 437만원이다. 월급의 약 3%인 13만1560원이 소소한 행복에 쓰이는 셈이다. 월급은 2.6배 올랐지만 그의 행복에 쓰이는 돈은 3.6배로 조금 더 올랐다.

하지만 이마저도 일반 제품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최근 열풍인 프리미엄 제품군과 비교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농심의 제품군 중 ‘스테디셀러’인 신라면과 프리미엄 라면시장을 연 짜왕과 비교해보자. 1996년의 신라면은 300원, 2016년 현재 짜왕의 가격은 1500원이다. 일반라면과 프리미엄 라면이라는 조건을 떼고 가격만 놓고 단순 비교를 하면 무려 400%나 가격이 올랐다. 이렇게 되면 그가 한달에 쓰는 돈은 13만5040원으로 훌쩍 늘어난다.

여기에 라면만큼 대중화되지 않았지만 프리미엄 소주를 마시고, 장소가 집이 아닌 음식점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소소한 행복은 더 이상 소소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서민식품으로 간주되던 라면과 소주가 부담스러워진 데에는 지난해 불기 시작한 프리미엄 라면 열풍이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끓어오르는 라면, 부담은 서민 몫

국내 라면 시장은 지난해 중반부터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프리미엄 짜장라면에 이어 짬뽕라면까지 인기를 끌면서 2013년 이후 2년 만에 다시 연간 2조원대 시장을 형성하게 됐다.

프리미엄 라면 시장을 활짝 열어젖힌 건 농심이다. 지난해 4월 굵은 면발과 불 맛이 느껴지는 간짜장 소스로 구성된 ‘짜왕’을 출시했다. 한달 만에 부동의 1위 ‘신라면’의 뒤를 쫓으며 국내 라면시장 2위로 올라섰다. 9월에는 누적매출 650억원을 돌파했다. ‘짜왕’의 열풍에 다른 업체들도 경쟁하듯 프리미엄 짜장라면 시장에 뛰어들었다. 오뚜기는 굵은 면발의 ‘간짜장’을, 팔도는 이연복 셰프를 모델로 내세워 ‘팔도짜장면’을 선보였다. 삼양식품도 ‘갓짜장’을 출시하며 프리미엄 짜장라면 열풍에 합류했다.

짜장라면의 인기는 날이 추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짬뽕라면으로 이어졌다. 업계에 따르면 농심 ‘맛짬뽕’은 출시 1개월 만에 1000만봉, 50일 만에 2000만봉이 팔렸다. 오뚜기 ‘진짬뽕’은 2개월 만에 2000만봉, 3개월 만에 4000만봉이 팔렸다.

‘프리미엄 라면’을 사이에 둔 업체 간 경쟁은 치열하다. 농심이 2013년부터 차세대 면발 개발에 착수해 1년 만에 굵고 납작한 면을 내놓았다면 오뚜기는 중화요리용 웍(Wok)의 원리로 불맛을 내는 데 집중했다. 업체들의 이런 노력은 고스란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서민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일반라면의 평균 소비자가격이 630원대인 것과 비교했을 때 프리미엄 라면은 두배 이상 비싼 1500원대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 주류업체가 너도나도 가격을 인상해 소주 출고가가 처음으로 1000원대에 진입했다.[사진=뉴시스]
가격 상승은 라면업계뿐만 아니다. 주류업계도 지난해 말 하이트진로의 ‘참이슬’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출고가를 인상했다. ‘참이슬’은 병당 961.7원(출고가 기준)에서 1015.7원으로,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은 946원에서 1006.5원, 맥키스컴퍼니의 ‘오투린’도 963원에서 1016원으로 가격이 상승했다. 소주 출고가격이 처음으로 1000원대에 진입한 거다. 여기에 맥주업계도 빈병 가격 등을 이유로 가격을 올릴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품업계는 신제품 연구개발(R&D)비와 원ㆍ부자재 가격 상승, 누적된 인상 요인 등을 들어 가격 상승의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국내 식품업체들의 매출 대비 R&D 비용은 0.69%에 그치고 있다. 전체 제조업 평균 R&D 비율이 3.09%라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그렇다보니 국내 식품업체들은 성공한 제품의 이름ㆍ모양ㆍ맛 등을 모방해 인기에 편승하는 ‘미투(me too)’ 전략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쟁적인 가격 인상보다는 획기적인 신제품으로 수익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송치호 이베스트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허니버터칩의 롱런을 예로 들며 프리미엄 라면의 인기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허니버터칩’이 ‘감자칩’이라는 핵심 정체성을 기반으로 맛의 변화를 시도한 것처럼 프리미엄 짜장라면이나 짬뽕라면도 일상화된 음식에 맛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향후 스테디셀러로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는 결국 라면의 평균가격이 지금보다 더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수록 얇아지는 지갑 탓에 곤궁해진 서민의 삶만 더욱 힘겨워지는 셈이다. 허기진 밤에 라면 한그릇을 끓여먹고, 고달픈 하루를 소주 한잔으로 달래던 서민들은 이제 이마저도 잠깐 주저해야 할 처지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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